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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처음으로 산 시집, 조재도 시인의 ‘교사 일기’를 다시 만나다

imbonita 2025. 3. 27. 20:31

40년 전 기억 속 시집과의 재회

서울로 전학 온 고등학생 시절, 전교조 초대 총무이셨던 담임 선생님이 한 권의 시집을 추천해주셨다.
친구와 함께 종로서적에서 구입했던 그 시집은, 내 인생에서 처음 산 시집이었다.
그 시집의 이름은 바로 조재도 시인의 『교사 일기』.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았던 한 편의 시, ‘참회록’.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낭독해주시던 그 시는 몇 해 동안이나 외우고 다닐 만큼 좋아했던 작품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조재도 시인의 시집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네이버에서도, 중고 서점에서도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우연히 이 시집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고,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 시인의 목소리를 다시 듣다: 주요 시 소개

 

참 회 록

조 재도

퇴근 후 소주잔 털어 넣으며
귀가하는 아이들을 본다


아침 자습에 정과 수업
보충수업까지 마치고 돌아가는
맥빠진 어깨의 아이들을 보면
25도 알콜에 허물어지는
뱃속 빈창자보다
감각도 없이 무너져 내리는 조국의 기둥이 보인다


아이들 앞에 우뚝 서 자유를 가르치고
정의를 양심을 불러일으켜야 할 사람이
아아 겨우 지식 소매업자

 

스승은커녕
우민화 교육의 선봉에 서서
사지선다 보충교재 참고서의 늪 속으로
죄 없는 아이들을 몰아넣고 있으니

 

유관순 열사 김구 선생
전봉준 대장이 될 수도 있는
다부진 어깨의 아이들에게
휴전선의 잔뿌리나 심어주고 있으니

 

오늘
진리는 백묵처럼 분질러지고
앵무새로 앵무새로 교단에 남아
가물대는 희망 끝내 부여잡기 위해
한두 줄의 참회록이라도 써야 한다.

 

‘지식 소매업자’라는 표현은 교사로서의 자괴감, 그리고 교육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아이들을 위한 교육이 아닌 체제에 순응하는 교육. 시인은 이를 고발하고 참회한다.

 

 

타는 장작의 노래

내 고향 산천을 
말하지 않으리
햇빛 따순 봄날 이야기 
노래하지 않으리
한 점 불에 불붙어 
타고 있을 뿐
허위와 굴종에 물든 
그 누구도 말하지 마라
예종과 부복에 길들여진 
그 누구도 접근하지 마라
밑둥 잘려 쓰러진 후
도끼날에 산산히 쪼개진 후
나는 세상의 모든 속박에서 
자유로와졌다
나는 타오르는 반항정신
불의 격정 가슴에 품으며 
소진되어 간다
근접하지 마라, 
칼바람도 총알도 썩은 불합리도
낼름거리는 불꽃의 정신 앞에 
근접하지 마라
처음부터 베어진다는 것은 
또 다른 회생
죽음이 죽음을 먹고 쓰러짐이 
쓰러짐을 먹는 
넓은 감옥 이 세상에서
종종걸음의 사람들 
몰려 있는 이 땅에서
화염의 뜨거움 속에 
몸 던지고 있다
오래오래 다져진 
삶의 질서를
와릉거리는 치마폭에 
맡기고 있다
내 고향 산천을 
말하지 않으리
햇빛 눈부신 봄날 이야기 
노래하지 않으리
한 점 불에 불붙어 
타고 있을 뿐
타올라 맑은 알불 
숯으로 남아
베어져도 베어지지 않는 
뿌리로 남아.

 

불꽃과 장작은, 타오르며 스스로를 소모하지만 동시에 세상을 밝힌다.
자유와 저항의 상징으로 쓰인 장작은, 사회의 부조리와 싸우는 시인의 뜨거운 심장을 대변한다.

 

교사 일기

있다. 베품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면서
깨어난 새벽 밝아오는 여명 바라보면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생각하면서
침묵하는 사람들, 있다

우리의 심장은 외롭다
교과서를 읽고 지시사항을 전달하는
우리의 말은 슬프다
걸려 있는 외투처럼 항상 고독타

그런가
몸 떨림으로 뒤책임으로
끝장이다 끝장이다
울부짖을 만큼
정말 슬픈가 그토록 외로운가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우리의 심장
녹슬게 하는 것
함구무언 보신 안명 못 본 척 못 들은 척.....
언제부터인가 이 암독 살을 헤집고
피 속에 흐르기 시작한 때는

우리의 침묵 속
강이 보인다
죽음의 강 끝내 
눈 뜨지 못한 채 몰려다니는
피라미떼들
아이들이 보인다.

 

‘아이들 앞에 선 교사는 외롭다’
교사로서의 고뇌, 말하지 못하는 진실 속에서도 끝내 교육의 본질을 잊지 않으려는 시인의 고백이 담겨 있다.

 

너희들에게

싹수 있는 놈은 아닐지라도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모범생은 아닐지라도
나는 너희들에게 희망을 갖는다
오토바이 훔치다 들켰다는 녀석
오락실 변소에서 담배 피우다 걸렸다는 녀석
술집에서 싸움박질하다 끌려왔다는 녀석
모두 모두가 더없는 밀알이다
공부 잘해 대학 가고 졸업하면 펜대 굴려
이 나라 이 강산 좀먹어 가는
관료 후보생보다
농삿군이 될지 운전수가 될지
공사판 벽돌 나르는 노동자가 될지
모르는 너희들에게 희망을 갖는다
이 시대를 지탱해 가는 모든 힘들이
버려진 사람들 그 굵은 팔뚝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나는 너희들을 믿는다
공무원 관리는 되지 못해도
어버이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도
동강난 강산 하나로 이을 힘이 바로 너희들
두 다리 가슴마다 들어 있기에
나는 믿는다 통일의 알갱이로 우뚝우뚝 커가는
건강하고 옹골찬 너희 어깨를.

 

“오토바이 훔친 녀석, 오락실 변소에서 담배 피운 녀석… 그 모두가 밀알이다.”
평범하거나 문제아로 보이는 아이들에게서 진정한 희망을 발견하는 시인의 시선이 뭉클하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가난하고 무식한 부모에 대해서도

낫과 호미에 걸려 있는 흙노동에 대해서도

학교 그만두고 서울 가면

가방공장 철공소

몇 푼 안되는 돈에 찢겨야 하는 것도

너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나이 열여섯

꿈과 낭만이 깃든 고교 일년생

하나하나 조심하고

열심히 공부해야 할 때이지만

공부하기 싫어 가출했던 것도

꿈이 없어 뛰쳐 나간 것도

아니었음을 너는 잘 알고 있었다

한 달 넘게 결석하고 돌아와

다시 학교 다닐 수 없느냐며 고개 숙이던 너

사람들 분주히 길 떠나는

차부 대합실에서 너를 보았을 때

반가왔다 자퇴서까지 받아 놓은 뒤였지만

네가 들려주는 너의 속마음

더 이상 학교 다니는 것이 엄마에게 죄스러워

돈 벌 결심했었다는 네 얘길 듣고

나는 알았다. 어린 나이에 가난을 맛보아야 하는

어른인 너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를

 

 

박종숙

나는 종숙이가

어떤 아이인지 모른다

 

3교시 끝난 후 열린 임시 직원회 시간

교감 선생님께서

어제 우리 학교 2학년 8반 박종숙이란 학생이

가정의 빈곤함과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없음을 비관하여

농약 먹고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나는 종숙이가

어떤 아이인지 모른다

 

키는 얼마나 크며

머리는 어떻게 하고 다녔는지

가정 형편은 친구와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사실 나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종숙이의 집은 황도라고 했다

안면에서 버스 타고 40여 분 걸리는 곳

섬마을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에서

언니는 무슨 야간학교에 다닌다고 했다

 

종숙이네 집을 다녀온 담임 선생님은

눈이 빨개진 채 말씀하셨다

평소에는 명랑하고 아이들과도 잘 어울려

별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중학교 2학년 애가 어떻게 약을 먹고

죽었을까 생각하니 끔찍해요

 

그늘, 산업화와 문명, 아프게 깔려 있는

살점 살점들

 

안방에 놓여 있는 칼라 TV가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롭다 외쳐댔지만

천삼백 친구들은 너와 똑같이

떠들고 공부하고 장난쳤지만

 

아무도 너의 아픔 열다섯 소녀의

쑤셔대는 가슴 보지 못했다

아무도 살 속 깊이 곪아가는

네 쓰라린 가난 보지 못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과 한 마리의 양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데불고 가는 것이

선생의 사명이라 말해지는 땅

생각하면 그 한 마리의 양은

혹 너 종숙이가 아니었을까

아니 아니 종숙이와 같은 가슴 앓으며

뒤쳐진 채 살아가는 사람들 아닐까

 

같은 반 급우들도 기가 죽어

선생님의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는다

비어 있는 종숙이의 자리를 보며

어떤 아이는 얼굴 묻고 어깨를 들먹인다

 

오늘 교무실에서

가정의 빈곤함과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없음을 비관하여

한 학생이 자살했다는 이야길 듣고

얼굴은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하지만

키는 얼마나 큰지 알지 못하지만

복도에 오가는 아이들의 얼굴에서

나는 또 다른 종숙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너무 가난해서,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한 중학생.
시인은 그녀를 ‘알지 못했지만, 끝내 기억해야 할 존재’로 노래한다.
이 시는 우리 사회가 외면한 수많은 종숙이들에게 바치는 추모의 시다.

 

 

※ 시에서 오타는 수정 않고 원본 그대로 옮겼음.

 

같이 있던 책 속에서 발견한 40여 년 전 공납금 영수증

 

 

지금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 이 시집이 다시 기억되기를 바란다.
잊혀진 문학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찾을 수 있으니까.